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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직필(洪直弼) 1776(영조 52)∼1852(철종 3).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 남양(南陽). 호 매산(梅山). 자 백응(伯應). 시호 문경(文敬). 목사 홍선양(洪善養)의 손자이고 동지돈녕부사 홍이간(洪履簡)의 아들로 학문에 뛰어난 재질이 있어 7세에 한자로 문장을 지었으며 17세에는 성리학자 박윤원(朴胤源)으로부터 오도유탁(吾道有托)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1801년(순조 1) 사마시에 응시하여 초시에 합격하였으나 회시에 불합격하였고 이 후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원로학자인 송환기(宋煥箕)·이직보(李直輔)·임로(任魯) 등과 연령을 초월하여 교유하였다.
1810년(순조 10) 돈령부참봉(敦寧府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1814년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로 다시 임명되어 서연(書筵)에 참여하였다. 1838년(헌종 4) 이조에 재학(才學)으로 천거되어 다음해 장악원주부·황해도도사에 임명되었고 1840년 군자감정(軍資監正)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1844년에는 특별히 당상관으로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임명되었으나 소를 올려 사양하였고 이어 동부승지(同副承旨)·성균관좨주(成均館祭酒)를 비롯하여 1851년(철종 2)에는 대사헌(大司憲), 이듬해 지돈녕부사(知敦寧府使)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끝내 나가지 않았다. 1852년 7월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제수된 뒤 곧 사망하였다.
그의 학문은 육경(六經)은 물론 제자백가에 통달하였으며 문장에도 뛰어났다. 성리학에서 정자(程子)의 심본설(心本說)을 따라 한원진(韓元震)의 심선악설(心善惡說)과 임성주(任聖周)가 "성선(性善)은 곧 기질(氣質)이다"라고 한 것을 반대한 주리파(主理派)의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개천의 경현사(景賢祠)에 배향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홍직필 [洪直弼]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