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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산세고 (坡山世稿) 요약정보 및 구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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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성수침, 성혼, 성문준
출판연도 1980년 5월
출판사 파산세고간행위원회
판매가격 5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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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 상세설명

聽松先生集  - 성수침 [成守琛] ​1493(성종 24)∼1564(명종 19). 조선 중기의 학자.

조선의 은사(). 자는 중옥(), 호는 청송(), 시호는 문정(). 본관은 창녕. 동생 수종()과 함께 정암() 조광조()의 제자로서 형제가 다 명망이 높았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 때 스승 조광조가 처형되고 많은 선비들이 화를 입자 과거를 단념하고 두문 불출, 《대학》ㆍ《논어》를 읽으며 《태극도()》를 베껴 조화()의 근본을 탐구했다. 그 후 후릉() 참봉에 임명됐으나 사퇴, 파산( : 파주()) 우계()에 있는 처가() 근처에 은거하여 일생을 마치기로 했다. 1552년(명종 7) 조정에서 특히 내자시 주부(簿)의 벼슬을 내리고 예산() 현감에 다시 임명하여 등용코자 하였고, 그 뒤 토산()ㆍ적성() 현감 등의 벼슬을 계속해 주었으나 다 취임치 않았다. 글씨를 잘 써서 필명이 높았고 사망한 뒤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성수침 [成守琛] (인명사전, 2002. 1. 10., 민중서관)


牛溪先生集 - 성혼 [成渾] 1535(중종 30)∼1598(선조 31). 조선 중기의 학자.

조선의 학자. 자는 호원(). 호는 우계(). 시호는 문간(). 본관은 창녕. 청송() 수침()의 아들. 파평() 우계() 옆에 살았으므로 학자들은 우계 선생이라 불렀다. 17세 때 감시() 초시에 들었으나 병으로 복시를 못 치르게 되자 과거를 포기했다. 휴암() 백인걸()의 제자로 젊어서 이미 덕망과 학문이 뛰어났다. 선조 초에 경기 감사 윤현학()의 추천으로 참봉ㆍ현감 등의 벼슬을 받았으나 모두 사퇴, 이율곡()과 사단칠정 이기설()을 토론하고 새로운 학설을 주창했다. 공조 좌랑ㆍ지평ㆍ주부 등에 계속 임명되었으나 부임치 않았고, 율곡이 왕에게 권유하여 종묘 서령()의 벼슬을 내리고 부르니 조정에 들어왔다. 그러나 병으로 등청하지 못하자 왕은 약을 보내주고 편전(便殿)에서 인견하였다. 그때 왕이 쌀을 주니 부득이 받았으나 친척ㆍ동네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경연 참찬관ㆍ집의시정의 벼슬을 또 사퇴하더니 1583년(선조 16) 병조 참지, 이어서 이조 참의로 임명되었으나 곧 사임하고 경연()을 맡았다. 한때 사임했다가 이조 참의를 거쳐 이조 참판이 되었다. 율곡이 죽자 나라의 인재를 잃었다고 통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해 세자를 모시고, 이리저리 돌아 임금의 처소에 당도했다. 상소하여 용병ㆍ군량 등의 3책을 논하였다. 그 무렵 명나라의 주사 원황()이 들어와 함께 성리학을 논하여 원주사의 격찬을 받았고, 참찬ㆍ도헌의 벼슬을 다 사퇴했다. 환도 후 좌찬성 겸 비국당상()으로 있을 때 명나라 총독 고양겸()이 일본과의 화의를 권유하자, 영의정 유성룡()과 같이 그에 따를 것을 주장, 선조는 반대파의 의견을 들어 화의를 배척하였다. 때마침 화의를 주장한 전라 감사 이정암()에 대하여 관대한 조치를 주청하자 선조가 분노하여 고향인 파주로 내려갔다. 율곡과 같이 성리학의 대가로 후세에도 이름이 높으며, 이황()의 학설을 이어받아 율곡과 함께 《사칠속편()》을 완성하였고, 죽은 뒤 반대파들에 의해 관직을 빼앗겼으나 인조 초에 복귀, 좌의정에 추증되고 시호를 받았다. 벼슬에 오르기 전 우계에서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성혼 [成渾] (인명사전, 2002. 1. 10., 민중서관)

滄浪先生集 - 성문준 [成文濬] 1559(명종 14)∼1626(인조 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창녕(). 자는 중심(), 호는 영동()·창랑(). 대사헌 성세순()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현감 성수침()이고, 아버지는 좌참찬 성혼()이며, 어머니는 고령신씨()로 첨정() 신여량()의 딸이다.

1585년(선조 18) 사마시에 합격하여 연은전참봉(殿)·세자익위사세마()를 지냈다. 아버지가 무욕(: 아무 혐의없이 무고로 욕을 당함)을 당하게 되자 벼슬을 버리고 임천()에서 14년간 은거하였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뒤 사포서사포()를 거쳐, 영동현감()을 역임하였다. 박학한 학자로서 글씨도 잘 썼다. 창녕의 물계서원()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태극변()』·『홍범의()』·『창랑집()』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성문준 [成文濬]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